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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강소기업이 답이다]KCC정보통신, 이주용 회장 조회 3173 2012-12-24

회사를 설립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우매한 질문에 이주용 KCC(323,500원 △8,000 2.54%)정보통신 회장의 짧지만 신념에 찬 답변이 돌아왔다. 1960년대, 삶이 전쟁이었던 시대에 미국으로 유학간 한 청년이 한국에 IT산업의 불씨를 지피기까지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지난 17일 강서구 염창동에 위치한 KCC정보통신 본사에서 만난 이주용 회장은 78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아마 수 많은 난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요인도 이 회장의 ‘열정’이었을테다.

이 회장과 컴퓨터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1958년 미시간 경제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하던 때다. 그는 학과장의 배려로 미시건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오퍼레이터로 일하게 된다. 연구소에 있던 컴퓨터는 IBM 650으로 IBM의 첫 컴퓨터 기종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이 회장이 IT업종에 종사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매일 5시간씩 컴퓨터에 대해 공부하던 이 회장은 이후 대학원 학위를 따고 IBM에 입성하게 된다. 앞서 은행에 취직했지만 제대로 컴퓨터 관련된 일을 해보겠다는 도전 의식에 회사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이 결단으로 그는 IBM에서 일하게 된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이름도 얻게 된다.

1962년 이 회장은 한국에 터전을 잡게되는 기회를 맞게 된다. 당초 덴마크 정부에서 요청한 컴퓨터 관계 고문으로 파견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스케줄이 별안간 취소된 것. 파견 계획으로 이미 집은 물론 주변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던 터라 회사측 에 경비를 대신 내달라는 조건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을 떠난지 7년 만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이 회장은 풍요롭지 않은 한국인의 삶에 안타까워하며 IT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는 시장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곧 왓슨 IBM회장에게 한국 진출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일개 말단직원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용기를 낸 것이다. 이 용기는 IBM이 한국에 진출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이 회장은 IBM 한국대표, 한국생산성본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1967년 KCC정보통신의 전신인 한국전자계산소(KCC)를 설립하게 된다. 금융권은 물론, 주민등록 전산화 사업, 현대·극동·삼호건설·남광토건 등에 미국산 프라임 컴퓨터 공급도 이어졌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시스템 개발부터 해외 유수의 컴퓨터 업체의 중간 매개체 역할까지 국내 컴퓨터 시스템 중심에는 KCC정보통신이 있었다.

탄탄대로였던 이 회장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동갑내기 조카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삶에 회의를 느낀 이 회장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이익배당금을 실시했다. 3년 동안 이익배당금을 직원들과 나눴는데 1988년 회사에 노조가 생겼다. 노조 자체적으로 이익배당금을 나눠주겠다는 명목 하에 조직이 구성된 것. 그러나 이도 노조 내 내부 갈등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노조문제는 해결됐지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계획을 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 차남인 이상현 부회장에게 모든 경영권을 넘겼다.

이 회장은 45년간의 걸어온 경영인의 길을‘최선’이란 단어로 함축했다. 그는 “인생은 한 순간, 한 순간의 연속성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게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회장은 희소성의 아이템으로 성장을 꿈꾸는 중소기업들에게 “어떤 분야든지 누가 잘 된다고 사업을 하는 아니라 그 사업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몰입해 기업을 키워나갔으면 한다. 그 분야에 대한 자신감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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